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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설명
명심보감과 동국통감에 수록되어 자녀 교육의 덕목으로 삼은 청렴한 선비의 덕행과 명시인을 배출한 교동인씨 가문의 업적을 고서의 형태로 작품을 구상하였다.
▸문중 유래
교동 인씨 시조는 신라 유례왕 14년 중원 대륙에서 신라에 사신으로 와서 정착하여 아찬벼슬과 태상박사를 제수받은 인서 공 이시며 2세(世) 관공은 덕행이 높아 명심보감과 동국통감에 수록되었다.
신라 백제로부터 고려시대에는 이십여 분이 정승반열에 오르고 오십여 분의 당상관을 배출한 명문가로 특히 고려 인종 때 33세(世) 인빈공은 교동인씨 본관을 제수받은 득관조로 이태백과 소동파에 비견되는 대 시인 일 뿐만 아니라 대학자로 한림학사, 문하시중(현 국무총리)을 하시고 교수부원군에 봉군되었다.
39세(世) 인공수 공은 대장군으로 원나라에 맞서 고려를 위해 크게 공헌 하였고 41세(世) 인당 장군은 서북면병마사(현 군사령관)로 고구려 옛 땅 회복을 위해 압록강 건너 원나라 기지를 격파 하였다.
인당장군의 손자인 43세(世) 인원보 공은 판밀직사사(현 대통령 비서실장 겸 경호실장)로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상도 함창으로 유배되면서 우리 교동인씨 문중은 하루아침에 고려 시대 명문가에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어 조선시대에는 나라를 위해 크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고 명맥만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국권을 빼앗겼던 일제 강점기에는 60세(世) 한수공 60세(世) 시봉공 60세(世) 진명공등이 항일 독립의사로서 우리 가문의 자존심을 지켰으며 광복 이후에는 61세(世) 태식공이 재무장관을 역임하였으며 지금은 18개파 2만여 종원들이 교육계관계 산업계 문화예술계 종교계, 군 시민사회등 각계각층에서 중추적인 활동을 하며 선조님들께서 쌓아온 지난날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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