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고성이씨 조형물 및 유래문
- NEXT덕수이씨 조형물 및 유래문
본문
▸작품 설명
인천이씨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씨족이요, 아득한 원대(遠代)의 뿌리는 가락국의 김수로왕(金首露王)이다. 김해김씨(金海金氏), 허씨(許氏), 인천이씨(仁川李氏)는 같은 혈통(血統)이다. 그 후예(後裔).는 가락국의 철기문화를 꽃피웠고, 신라의 번영과 삼국통일에 이바지 했다.
특히 인천이씨는 130여년간 고려왕조(高麗王朝)의 중흥을 이루고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기반을 닦는데 기여, 그 기운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찬연히 빛나고 있다.
이와 같이 인천이씨는 우리 역사와 명운을 함께 해 온 중추씨족(中樞氏族)임을 상기시키는 뜻에서 한반도(韓半島)와 그 중심축(中心軸)에 ‘仁川李氏(인천이씨)’를 새겼으며, 주변석(主邊石)의 상승구도(上昇構圖)와 상단(上端)의 원형(圓形)은 우리 씨족과 더불어 모든 민족성원들이 지향해야 할 통합(統合)과 평화(平和)를 상징한 것이다.
반도의 중심부에 있는 와옥(瓦屋)은 시조(始祖)의 묘역(墓域 : 蓮化浮水形)과 원인재(源仁齋,인천지방문화재)가 있는 인천을 가리킨다.
▸문중 유래
인천이씨는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예로 비조(鼻祖)인 신라 병마사대광(兵馬使大匡) 허기(許奇) 공(公)이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안녹산(安綠山)의 난으로 피난간 당 현종(玄宗)을 호위(護衛)한 공로로 황제의 성인 이씨(李氏) 성을 하사받고 황제가 신라 경덕왕에게 전하는 오언십운시(五言十韻時)를 갖고 돌아와서 소성백(邵城伯)이 되었다. 그 자손이 대대로 소성(邵城: 현재의 인천)에 살다가 고려 8대 현종(顯宗)조에 이르러 이허겸(李許謙, 配 신라 경순왕의 손녀) 공(公)이 식읍(食邑) 천오백 호의 소성후(邵城候)에 봉해지면서 '소성(邵城)'을 본관(本貫)으로 하고 그를 시조공(始祖公)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후 인천이씨의 고려의 중추씨족(中樞氏族)으로서 열네분의 왕비(王妃)와 여덟 분의 왕(王)을 배출하여 130여년간 통일(統一)된 고려(高慮)의 중흥을 주도하였으니 그 후예(後裔)가 이룬 사적(史蹟)을 어찌 이곳에 다 담을 수 있으리오. 지금의 인천도 왕비와 왕이 배출된 경사(慶事)의 근원지라하여 당초의 소성(邵城)에서 경원(慶源),인주(仁州) 또는 어향(御鄕)으로 불리게 되었고, 우리 인천이씨의 본관(本貫) 또한 ‘소성(邵城)-> 경원(慶源)→인주(仁州)→ 인천(仁川)'으로 바뀌면서 오늘에 이어져오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