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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중도록

    청송심씨 조형물 및 유래문

    조형물번호 111
    작 품 명 청송심씨의 얼
    조 각 가 길홍랑
    본관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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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유례

    ▸ 작품설명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탑신은 청송심문의 기상을 표현한 것으로 주왕산에는 우리 문중의 영기가 서려 있고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러 자손만대의 무궁한 발전과 번영을 상징하고 있다. 

    가장 은 우리의 후손들이 전세계를 향하여 힘차게 발전하고 있음을 나타냈으며 문중의 사적을 기술하여 자신의  뿌리를 알고 숭조돈목 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청송심씨 유래

    경상북도 청송(靑松)을 관향(貫鄕)으로 삼은 청송심씨(靑松沈氏)는 고려조 고종(高宗) 원종(元宗)년간에 출생하신 문림랑공(文林郞公) 홍부(洪孚)를 시조(始祖)로 삼고 오랜 세월동안 위로는 조상(祖上)을 섬기고 아래로는 자손(子孫)을 보살피면서 국가추요(國家樞要)의 문중으로 현달(顯達)하였다. 


    문림랑공은 벼슬이 위위시승(衛尉侍丞)에 이르고 두 아드님을 두시니 長은 연(淵)으로 합문지후(閤門祗侯)이고 次는 성(晟)으로 봉익대부(奉翊大夫)이다. 지후공이 아드님을 두시니 용(龍)으로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에 추증(追贈) 되었으며 2남을 두니 덕부(德符)와 원부(元符) 두 형제분께서 벌열(閥閱)의 문을 열으시었다. 봉익공은 2남을 두니 長이 판서공 연(漣)이고 次는 상호군공 경(卿)으로 그의 예손(裔孫)은 북한지역 고도에서 대대로 번연(蕃衍)하니 세거지가 되었다. 정안공(定安公) 덕부(德符)는 문무를 겸비하여 고려조에서 대명외교와 왜구토벌에 공을 세워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군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지고 정종조(定宗朝)에는 좌정승에 올라 경륜을 폈다. 공이 7남을 두니 1남은 인봉(仁鳳)으로 도총제요 2남은 의구(義龜)로 판사이고 3남은 계년(繼年)으로 지성주사이다. 


    4남은 징(澄)으로 인수부윤이고 5남은 온(溫)으로 영의정이며 세종국구로 시호(諡號)가 안효(安孝)이다 6남은 종(淙)으로 태조대왕의 2녀 경선공주를 맞아 부마도위 청원군이요 7남은 정(泟)으로 동지총제이다. 악은공(岳隱公) 원부(元符)는 전리판서(典理判書)의 지위에 올랐으나 고려조가 종언을 고하자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켰으며 세분의 아드님을 두니 1남은 천윤(天潤)으로 영동정이요 2남은 천주(天柱)로 현령이며 3남은 천식(天湜)이다. 그 외 자손들도 모두가 동량지재(棟樑之材)였고 계계승승(繼繼承承) 잠영세족(簪纓世族)이 되어 국가를 이끌었다. 


    청성백의 5남 온(溫)의 따님이 세종대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로 한때 부왕이신 태종(太宗)의 외척배격정책으로 멸문지경에 이르렀으나 왕후의 영민함과 공덕에 힘입어 위기에서 비켜날 수 있었으며 이후로 청송심씨는 동국 10대 벌족으로 번영하여 왔다. 


    인구수는 우리나라 256성씨 중 38위지만 명현달사(名賢達士)를 수없이 배출하여 정계추요(政界樞要)의 각신(閣臣)으로 혹은 노사숙유(老士宿儒)로 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13정승 2문형 3왕후 4부마에 정승(政丞) 중에도 영의정이 9명으로 각 문중 중에서 으뜸이며 내리 3대정승과 형제가 정승을 지내기도 했다. 대과급제가 196명이고 무과급제는 350여명 공신책록이 400여명이니 더 할 수 없는 영예이다. 역경(易經)에 착한 일을 쌓은 가문에는 반드시 경사스러움이 있다했거니와 오늘 이 시대를 사는 후손들도 각계에서 중추적인 역할로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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