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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작품 설명
고구려때 팔학사로 우리나라에서 입국한 진주형씨의 상징 로고를 중심으로 유선형의 주 조형 형태는 가문의 화합과 힘차게 비상하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
▸문중 유래
형씨시조(邢氏始祖)는 성왕(成王)때 주공(周公:무왕동생)의 넷째 아들을 형후(邢候)로 봉(封문) 것이 근본이다. 형씨(邢氏)의 유래(由來)는 서주(BC 1057 ? BC 771 년) 무왕(武王)의 동생 휘(諱) 단(旦)의 건국호(建國號)는 주(周)이며, 넷째 아들인 휘(諱) 정연(靖淵:저(?) 시호 붕숙(朋淑)을 형후(邢候)에 봉(封)한 것이 근본이다.(현:형태시(形台市) 한국시조인 형 옹(邢 ?)의 시조(始祖)이시다.
누세후(累世後) 휘(諱) 옹(?)은 당(唐)나라 태종(太宗) 정관 8년인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17년 때 영류왕의 요청(要請)에 의하여(서기 634년)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唐)나라 문화 문학 유교 보급”에 공헌하고 학문으로 크게 기여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녹훈됐고, 삼중대광(三重大匡) 보국 벼슬에 이르렀으며, 관향(貫鄕)을 남양(現 수원부근)으로 사향(賜鄕)받아 뿌리를 내렸다.
형방(邢肪)은 고려 충목왕 때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대광보국(大匡輔國)의 벼슬을 지냈으며, 형방의 손자 15세(世) 형공미(邢公美)는 서기 1280년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군을 정벌한 후 진양군(晉陽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형방을 관향조로 하고 진주(晉州)를 본관으로 했다.
형방의 현손(玄孫) 17世:형찬(邢贊 서기 1424년)이 조선조에서 통헌대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고, 아들 4형제 중 2명은 무후(无后)하고, 3남 형군소(君紹)가 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양윤을 거쳐 춘천, 회양, 강릉 삼도(三都)의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후 이부상서, 정당문학(政堂文學)등을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나 [동문선(東文選)]에 [부벽루운(부벽루운)]이 전한다.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이며, 판서공파(判書公派)의 시조이다.
4남 형군철(君哲)은 세종(世宗) 때 선전관(宣傳官), 강계부사(江界府使) 등을 지내고 충청도병마사(兵馬使)를 지냈으며, 병사공파(兵使公派)의 시조이다.
이들 후손들이 오늘날 한국 각 지역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주공(周公)의 사적(史蹟) : 주(周) 나라는 웨이수이강(황하(黃河)으로 흐르는 지류(支流))가 흐르고 있는 곳으로 당시의 수도(首都)는 시안이고, 태공망(강태공)이 주(周)나라 초(初)의 정치가이다. 주 나라의 서백이 죽은 후 큰 아들 발이 서백의 뒤를 이었으나, 주공(周公)이 건국(建國)하였다. 이리하여 제후의 영지(領地)가 결정되어, 무왕(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에게는 노(魯)나라가 태공망에게는 제 나라가 주어졌다. 무왕(武王)이 죽은뒤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 성왕(成王)이 되니 주공이 어린 성왕을 도와 정치(政治)를 하였다. 그리고 성왕과 주공에 의해 봉건제도(封建制度)가 정비(整備)되어 주왕조(周王朝) 기초(基礎)가 다져졌다. 주공은 주(周)나라의 정치가로서 후세(後世) 사람들에게 성인(聖人)으로 불리었으며, 춘추시대 공자(孔子)도 이상의 정치가로 존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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