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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설명
학은 장수하며 청렴결백한 동물이다. 표씨화수회에서는 후손이 자손만대 건강하게 영원히 번영하자는 뜻과 청렴결백한 선비가 많이 배출되어 조국에 공헌하자는 뜻을 겸하여 학을 선택했으며 높은 창공을 유유히 날으는 모습에서 학의 늠름한 품성과 아름다운자태를 표현하고자 날개를 펼치며 허공을 날으는 두마리의 학이 태양과 구름을 배경으로 날으는 모습을 선정하였다.
▸ 신창표씨 유래
표씨(表氏)는 신창(新昌) 단일본이며 시조는 송(宋)나라 때 후주(後周)의 이부상서(吏部尙書) 표대박(表大圤)으로서 절의(節義)를 지켜 고려로 망명 귀화하여 온창현(溫昌縣) 신창현(新昌縣)에서 정주(定住)하게 되었다. (고려 광종11년) 250년뒤 중시조 표인여(表仁呂) 해관지후합문지후 평장사(解官祗侯閤門祗侯 平章事)는 고려말 충숙왕 때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온창백(溫昌伯 現 牙山郡新昌 竹山 1, 2里)으로 오게되어 표씨들이 사실상 시조로 모시며 신창을 본관으로 삼은 효시(嚆矢)다.
표씨(表氏)는 조선조에 10여명의 문과급제를 배출하여 5세손 표계(表繼)는 세종때 양덕현감(陽德縣監)과 상주 유학교수관을 지냈으며 별세후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위로 표연원은 석성현감(石城縣監) 표연한은 병마절도위 성천부사(兵馬節都尉 成川府使)를 지내고 표연말(表沿沫 號 藍溪 平石)은 홍문관 겸 예문관제학(弘文館提學 兼 藝文館提學 成宗22年)을 연산조에 벼슬이 우승지와 대사성에 이르렀다.
후일 중종(中宗4年)은 제문(祭文)을 직접 지어 추모장례를 치르게 하고 상주군함창의 임호서원(肅宗18年)을 건립하고, 함양군의 구천서원(龜川書院 肅宗 27年), 의령의 숭보사(崇報祠 憲宗7年)에 배향 되고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가증(加增)하였다. 표연말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준(準)은 사헌부 감찰 차남 표빙(表憑)은 중종조(中宗組)에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 겸 도승지(都承旨) 셋째 충은 능참봉 부사(府使)를 지내는 등 3대가 문과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냈다.
또 전라도사를 거쳐 울산부사를 지내고 우의정과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에 추증된 표빈(表贇 선조39년 神道碑 居昌所在)은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상을 받았으며 울산에 선정비가 세워져 있고 그의 아들 표헌(表憲 묘 경기 남양주 천마산)은 선조때 어전통사(御前通事)로 명나라 사신을 통역과 재치로 왕이 곤경을 면케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宣祖) 를 조선(朝鮮)에 남을 것을 계청(啓請)한 공으로 선무원종 1등 공신(宣武原從 一等公臣)에 추훈되었다. 표정노(表廷老) 지중추부사 대호군(知中樞府事 大護軍) 은 光海君때 선친(先親)에 못지않은 명역관으로 원접사에 역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시(詩)로서 오만방자한 태도를 공손케 만들었다.
신창표씨(新昌表氏)는 충효(忠孝) 節義 (節義) 정도(正道)의 선조유업정신을 계승한 후손답게 항상 나라발전에 영원한 초석이 되고저 전종원의 뜻을 모아 이 조형물을 건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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