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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설명
조선조 명재상인 맹사성의 청백한 이미지를 선비의 갓과 대나무로 표상하여 가문의 역사성을 상징함.
전체적인 작품구성을 통해 선조와 후손이 화합하고, 나라와 가문의 번영과 발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문(門)의 형태로 형상화함.
▸ 문중 유래
新昌孟氏는 아성공 孟子의 후예로 한국지파의 원조(遠祖)는 맹자 四十세손 承訓(승훈)으로 당이 멸망할 때 정란을 피하여 왕래가 빈번하였던 기량천(신창현)을 거처 도래한 것으로 알려져 이후 新昌이 孟氏의 본관이 된 유래이다.
孟氏는 선계(先系) 휘 理(리) 시중공을 비조(鼻祖)로, 고려 충혜왕 때 조적(曺?)의 난을 평정한 공훈으로 신창백에 훈봉된 휘 儀(의) 이부전서공이 시조이다.
二세는 휘 裕(유) 휘 福(복) 두 분으로 裕는 이부상서를 역임한 상서공으로 고려 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다 두문동에서 순절한 七十二현의 한 분 이며, 福은 공조전서를 지낸 전서공으로 관북파의 파조이다.
三세는 두문동 七十二현의 또 한 분이며 수문전 제학을 역임한 휘 希道(희도) 동포 공으로 아버지 상서공이 두문동에서 순절하자 구세거지인 한주(서천)를 거처 사돈 崔瑩(최영) 시중공의 옛집이 있는 온양 금곡촌(아산)으로 옮겨 은둔 생활을 하면서 후학을 모아 강론하니 이곳을 행단(杏壇)이라 이르고 현재 국가사적 제百九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조가 온양 행차 시 공의 묘소에 치제를 지내고 충효세업(忠孝世業). 청백가성(淸白家聲)의 어필사액을 내리니 맹씨 문중의 영광이요 명예로다. 四세는 휘 思誠(사성) 문정공이다. 공은 고려조 崔瑩시중공의 손서로 우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 한 후 우헌납을 역임 중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수원 판관으로 출사 태조 정조 태종 세종 등 四조를 섬기면서 많은 업적을 남긴 현신이다. 특히 공은 조선조의 대표적 청백리일 뿐 아니라 백성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눈 서민적 정승으로 많은 일화가 전하여지고 있다. 五세는 휘 歸美(귀미) 감찰공이고, 六세는 휘 孝曾(효증) 중추부사(中樞府使)와 휘 繼曾(계증) 형제로 孝曾은 자손이 무후하고 繼曾은 공조참판에 증직된 신원군(新原君)이다. 七세는 휘 碩欽(석흠), 碩卿(석경), 碩俊(석준), 碩麟(석린) 네 분이나, 碩麟는 자손이 무후하니 이후 신창군파 碩欽, 사직공파 碩卿, 호군공파 碩俊 등 三파로 분파되어 二世 분파인 관북파를 포함 四파로 나뉘어 대대로 많은 등과(登科) 현관 공신 효자 효부 등을 배출한 우리나라 유수의 명문(名門)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맹씨문중은 충효세업 청백가성을 종훈으로 충효(忠孝) 청백(淸白)충신(忠信) 접례(接禮) 수절(守節)등 선조의 유훈을 널리 계승 발전 시키고자 여기에 유래비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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