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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작품 설명
안동장씨 조형물은 근엄함과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현손인 점을 감안하여 본 조형물을 구상하며, 상부의 관모의 형상을 위엄있는 형상을 통하여 안동장씨의 선조들의 업적을 후손들이 더 나은 미래로의 번영을 이룩하고자 함이다.
▸문중 유래
"시조의 휘(諱)는 길(吉)이고, 자(字)는 영보(寧父)이며, 호(號)는 포음(圃蔭)이고, 시호(諡號)는 충헌(忠獻)이다. 후에 다른 나라에서 쓰던 이름으로 공(功)을 세움이 의(義)가 아니라고 여겨 정필(貞弼)로 고쳤다.
그는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 장군의 현손(玄孫)이다. 장보고 장군 사후(死後)에 그 가족들은 당나라 적산촌(赤山村)으로 이주하였으며, 시조는 당나라 절강성(浙江省) 소흥부(蘇興府)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시조를 소개하는 후일의 기록들에서 당나라 절강성 소흥부 사람이라 하였다.
시조는 대략 다섯 살 되던 해에 바다를 통해 가족들과 함께 다시 신라로 돌아 왔으나, 당시 신라 또한 대단히 혼란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성장하면서 입당수학(入唐修學)의 꿈을 갖고 있었는데, 마침내 기회를 얻어 당나라에 들어가 학문에 전심한지 6년 만인 24세 때에 장원으로 급제 하였다. 후일 관직이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게 되었고, 그의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중원에 높이 드날리게 되었으나 무고(誣告)를 당하여 결국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930년 고려 태조와 견훤 간에 벌어진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의 병산 전투에서 시조는 고창성주(古昌城主) 김선평(金宣平), 영장(營將) 김행(金幸, 후일 權氏을 받음)과 더불어 태조를 도와 큰 승리를 거두었다. 태조는 김선평을 대광(大匡)으로 삼고 시조와 권행을 대상(大相)으로 삼았으며. 고창을 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라 하였다. 태조는 이들 세 사람에게 안동(安東)으로 사관(賜貫)하고 식읍(食邑)을 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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