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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진이씨 유래
이총언(李忩言)은 신라말기에 태수(太守)로서 벽진군(碧珍君)을 보전하고 있었는데, 당시(當時) 도둑의 무리가 충만(充滿)하였으나 총언(悤言)이 성(城)을 튼튼히 하여 굳게 지키니 백성들이 그 덕화(德化)에 힘입어 평안하였다. 고려 태조(太祖)가 사람을 보내어 함께 협력(協力)하여 화란(禍亂)을 평정(平定)할 것을 효유(曉諭)하니 총언(忩言)이 글월을 받고 매우 기뻐서 그 아들 영(永)으로 하여금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보내어 태조(太祖)를 쫓아 정토(征討)에 공을 세우니 영(永)의 그때 나이가 십팔세(十八歲)였는데 태조는 대광(大匡)의 품계를 내리고 공주인 사도귀녀(思道貴女)를 그의 처(妻)로 삼게 하고 총언(忩言)을 벽진장군(碧珍將軍)으로 배수(拜授) 함에 있어 백리봉강(百里封彊)하고 또 이웃 고을의 이백이십구정호(二百二十九丁戶)를 더 주고 다시 충주(忠州) 원조(原州) 광주(廣州) 죽주(竹州) 제주(堤州)의 창곡 이천이백석(二千二百石)과 소금 일천칠백팔십오석(一千七百八十五石)을 주었으며 또한 친서(親書)를 보내어 금석(金石)같은 신표(信標)를 보이면서 이르기를 자손(子孫)에 이르기까지 이 마음 변(變)치 않으리라 서약(誓約)하였다.
총언(忩言)은 이에 감격(感激)하여 군정(軍丁)을 단결(團結)하고 군량(軍粮)을 저축(貯蓄)하여 고성(孤城)으로서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가 서로 쟁취(爭取)하려는 지역(地域)에 끼어 있으면서도 흘연(屹然)히 동남(東南)의 성원 (聲援)이 되었다.
고려 태조(太祖) 이십일년(二十一年.938年)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이 팔십일세 (八十一歲)였으며 아들은 달행(達行)과 영(永)이시다. 이로 인(因)해 본관(本貫)을 벽진(碧珍)으로 하여 자손(子孫)들이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오면서 역대현조(歷代顯祖)가 혹(或)은 문한(文翰)과 도의(道義) 또는 충절(忠節)과 청백(淸白)으로 명현거경(名賢鉅卿)이 연면(連綿)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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