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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설명
의령 남(南)씨 선조들의 절의(節義)와 유서 깊은 역사의 특징을 잘 살려 세련된 형태로 표현한 작품이다. 또한 아름다운 곡선의 원은 서로 대칭을 이루고, 통일된 조화 속에 화합(和合)을 뜻하고 원안의 타원은 강한 생명력과 문중의 번영(繁榮)을 의미한다.
▸ 의령남씨 유래
남씨성(南氏姓)은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14년 시조(始祖) 영의공(英毅公) 민(敏)이 왕으로부터 남씨(南氏)로 사성(賜姓) 받은 것이 시초이다. 1200년대 고려(高麗) 후기에 이르러 남씨(南氏)는 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 삼관(三貫)으로 나누어졌다. 의령남씨(宜寧南氏)의 관조(貫祖)는 고려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직부사(樞密院直副使) 남군보(南君甫)이다. 의령남씨는 고려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고려 말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를 지낸 곡은 을진(乙珍)은 나라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신념으로 감악산 암굴에 들어가 단식 순절한 절신(節臣)으로 후세의 추앙(推仰)을 받고 있다. 조선조(朝鮮朝)에는 충경공(忠景公) 재(在)와 강무공(剛武公) 은(誾) 형제는 조선개국에 훈1등의 공을 세워 중앙정계에 진출, 재(在)는 의정부 영의정이 되었고 은(誾)은 증 좌의정이 되었다.
이후 대대로 숱한 현신(賢臣)과 학자들이 배출되어 씨족의 위세를 높여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 의령남씨를 조선조의 20대 명벌의 하나로 꼽고 있다. 정승(政丞) 6명, 대제학(大提學) 6명, 판서(判書) 22명, 문과급제자(文科及第者) 140여명이 나왔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는 남덕우(南悳祐)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많은 인재가 정․재계 법조계 학계 등 여러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다.
의령남씨는 지금 전국에 20여만 명이 산재해 살고 있으며 의령남씨의 본산(本山)인 의령군 의령읍 서동리 400번지에는 관조 의령군(宜寧君)의 묘소와 재실 비각 관리사가 있으며 매년 춘추로 전국의 자손들이 모여서 시제(時祭)를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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