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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설명
이 작품은 거석(巨石)을 조형적으로 재구성하여 현대미술의 흐름에 연결한 형태이다. 바위는 십장생(十長生)의 한부분 불사장수(不死長壽)의 상징으로 늘 무겁고 단단함을 상징하며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기백과 품위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이러한 상징성은 흔들림이 없고 당당한 형태로의 재구성을 통하여 생명의 개체들이 서로 연관되고 화합하면서 생성하고 진화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생성과 진화, 즉 발전에 대한 의미는 빈우광 시조의 후손들의 영원한 발전을 표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늘은 떠받치는 기둥과 열린 공간사이로 보여지는 조형물 주위의 공간들은 개방성과 환경성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 대구빈씨 유래
대구빈씨는 빈우광(賓宇光)선생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선생은 자를 대용(大用)이라 하고, 그 호는 송헌(松軒)이다. 그는 중국 노나라때 공자의 문인(門人)이었던 빈모가(賓牟賈)의 후예로서 중국 명문가에 태어나서 일찍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송(宋)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셨다. 그 후 선생은 몽고가 송나라를 점령하여 원나라를 세우자 송나라 비각(秘閣)에 소장된 사천여책(일만칠천권)을 배에 싣고 고려에 귀화하여 고려유학을 발전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충숙왕(忠肅王)은 선생의 공을 인정하여, 수성군(壽城君)으로 봉하시고 수성부(壽城府)를 식읍으로 내리셨다. 선생은 판도판서(版圖判書) 이실(李實)의 딸인 진성군부인(眞城君夫人) 진보이씨(眞寶李氏)와 결혼하여 아들 빈규창(賓珪昌)을 낳았다. 그의 자는 백세(百世)요, 호는 만목당(晩穆堂)이시다. 선생의 후손인 빈씨는 밀양(密陽), 수성(壽城), 달성(達城), 대구(大邱), 남원(南原), 육창(陸昌), 안주(安州), 영광(靈光), 경주(慶州), 의성(義城)등의 본관으로 되어 있었으나, 시조가 수성군이고 식읍지가 수성부 즉 지금의 대구인 까닭에 그 본관을 대구로 통합하여 대구빈씨가 된 것이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선생의 후손은 대구시 동구 도동 산153번지 팔공산 산하 신좌(辛坐)에 제단을 만들어 참배를 하고, 매년 한식일에 절사(節祠)를 뫼시고 있다. 이러한 빈씨는 680여년간 내려오면서 공신, 충신, 효자, 효부, 사업가, 학자 등을 배출하여 뿌리를 튼튼히 하고 친목을 유지하면서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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